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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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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종은 조선의 제6대 왕으로, 문종과 현덕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1452년 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할 왕비가 없어 숙부인 수양대군과 금성대군이 보필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단종은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1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으로 추존되었으며, 현재는 영월 장릉에 묘가 있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복위 시도 등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으며, 무속 신앙과 대중문화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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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단종 어진
단종 어진 (1927년 추정)
이홍위 (李弘暐)
묘호단종 (端宗)
시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능호장릉 (莊陵)
위치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왕위 정보
왕위조선 국왕
재위 기간1452년 5월 18일 ~ 1455년 윤6월 11일 (음력)
즉위식경복궁 근정문
전임자문종
후임자세조
세손 정보
작위조선국 왕세손
재위 기간1448년 4월 3일 ~ 1450년 7월 20일 (음력)
후임자왕세손 연 (현종)
세자 정보
작위조선국 왕세자
재위 기간1450년 7월 20일 ~ 1452년 5월 18일 (음력)
전임자왕세자 향 (문종)
후임자왕세자 장 (의경세자)
상왕 정보
작위조선국 상왕
재위 기간1455년 윤6월 11일 ~ 1457년 6월 21일 (음력)
전임자상왕 태종
후임자-
출생 및 사망
출생일1441년 7월 23일 (음력 8월 18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사망일1457년 10월 21일 (음력 11월 17일)
사망지조선 강원도 영월군 관풍헌
가족 관계
아버지문종
어머니현덕왕후 권씨
배우자정순왕후 송씨
기타 정보
존호공의온문 (恭懿溫文)
로마자 표기Danjong
능묘

2. 생애

단종은 세종의 재위 시절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현덕왕후는 출산 다음 날 사망하였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2], 너무 어려 황보인, 김종서, 경혜공주가 섭정하였다.[3]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황보인과 김종서는 경복궁 문 앞에서 처형되었다. 1454년 단종은 정순왕후와 혼인하였고, 1455년에는 강제로 퇴위하여 상왕이 되었다.

이듬해 사육신이 복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으며,[2]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군으로 유배되었다. 세조는 처음에는 단종의 처형을 주저했으나, 결국 그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1457년 처형을 명했다.[2]

중종 재위 시절 단종과 정순왕후의 추존 시도가 있었으나 거절되었다. 숙종 재위 시절 학자들의 재시도로 1698년 노산군과 그의 아내는 복권되었고, 단종과 정순왕후라는 시호 및 추존호를 받았다.

2. 1. 생애 초반

1441년 8월 9일(음력 7월 23일)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현덕왕후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사망하였다.[2] 이 때문에 단종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병약한 아들 문종과 어린 손자 단종을 걱정하여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단종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2. 2. 즉위

1452년(문종)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나이로 조선 제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2]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2]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의정부 대신들이 정사를 주도하였다.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어 신권이 강화되었다.

어린 단종의 즉위로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왕권은 위축되었고, 반면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당시 서열이 높은 왕비가 없어 수렴청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왕족 대표 2명에게 보필을 요청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세조)과 금성대군이 선정되었다. 한편 의정부에서는 황보인과 김종서가 실권을 쥐고 황표정사 제도를 통해 권력을 남용하여 성삼문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 2. 1.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종친의 대표로서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자처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했다.[2]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 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써,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으며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3]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2. 2. 2. 단종 복위 운동

1456년 음력 6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세조 즉위 이듬해(1456년) 성삼문, 유성원, 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 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 했으나, 가담자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알려 정창손의 설득으로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다.[13] 1457년 단종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폐주)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련된 여인과 재산은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14]

2. 3. 최후

1457년 음력 10월 21일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15] 중종 때까지 장례나 무덤도 제대로 못한 점으로 보아 타살이 확실해 보인다. 또한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증거로, 의금부의 공사와 처형 당시 영월 주민들의 증언 기록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 단종 이홍위가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16] 《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교살|교살중국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이 죽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17] 영월군의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 곳에 가매장하였다.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상을 치르기도 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한을 품고 사망하였으므로 단종은 무속의 신의 한 사람으로 모셔졌다. 영월군 군내면 영흥리(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세워진 단종의 사당 영모전 외에도 단종은 무속의 신 중 왕신의 한 사람으로 모셔졌다. 영흥11리 마을 서낭당과 양주 신혈면(현 서울 은평구) 지역의 일부 무속인은 단종을 무속의 신으로 모셨다.

3. 복권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사망한 지 224년 만인 1681년(숙종 7) 7월 숙종의 특명으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묘소는 장릉으로 격상되었다.[2]

4. 가족 관계

인물본관생몰년부모비고
문종전주1414년 - 1452년세종
소헌왕후 심씨
조선 제5대 국왕
현덕왕후 권씨안동1418년 - 1441년화산부원군 권전
해령부부인 최씨



배우자시호본관생몰년부모비고
왕비정순왕후 송씨여산1440년 - 1521년여량부원군 송현수
여흥부부인 민씨
세조 3년(1457년) 폐위[2], 숙종 24년(1698년) 복위



작호본관이름생몰년부모비고
숙의숙의 김씨상산(미상)? - 1525년김사우
이씨
숙의숙의 권씨안동중비? - ?권완
(미상)


5. 능묘

1457년 16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사대문 밖 80리[18] 이내에서 벗어난 능 중의 하나이며,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이 설치되어 있다.

강원도 영월의 장릉

6. 기타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재위 시절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혜온왕후는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사망하였다. 슬하에 경혜공주와 이복누이 경숙공주가 있었다.

1454년 1월, 14세의 단종은 15세의 정순왕후와 결혼하였다. 1455년, 세조의 강요로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고, 아내는 의덕왕후가 되었다. 이듬해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다.[2]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군으로 유배되었고, 왕후 또한 노산군부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중종 대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학자들이 다시 시호 복구를 건의하여, 1698년 노산군과 부인은 복권되고 단종이라는 시호와 정순왕후라는 추존호를 받았다.

전 한성부윤 추익한은 종종 단종에게 산포도를 바치고 시를 주고받았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날, 추익한은 꿈에서 흰 말을 탄 단종이 태백산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 때문에 한국 민간신앙에서는 단종이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다고 믿는다.

6. 1. 동학사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동학사 숙모전에는 단종, 사육신, 생육신 등 관련 인물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1]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1]

6. 2. 싸리재

단종은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될 때 여주시-원주시 부론면-귀래면-신림면의 싸리재를 거쳐 영월로 갔다. 이때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명의 호송을 받았다고 한다. 싸리재는 의병장 김상태가 활약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호좌의진이라는 의병 부대의 중군부대를 이끌며 영천의 조령, 문경의 갈평, 원주 싸리재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1]

6. 3. 무속 신앙

민간과 무속에서 단종은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지며, 노산군지신(魯山君之神)이라고도 불린다. 영월 영월읍에 있는 영모전(永慕殿) 서낭당을 비롯하여 영월·정선, 삼척태백산 인근의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고 있다. 그밖에 양주시 신혈면(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지역에도 단종을 무속의 신으로 모시는 무가가 일부 있다.[15]

전 한성부윤(漢城府尹) 추익한(秋益漢)은 가끔 단종에게 산포도(山葡萄)를 바치며 함께 시를 지었다. 단종이 죽던 날, 추익한의 꿈에 흰 말을 탄 단종이 나타나 "태백산(太白山)(대한민국의 산)"에 간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 때문에 한국의 민간신앙에서는 단종이 태백산의 신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7. 대중문화 속의 단종

다음은 단종이 대중문화에서 어떻게 그려졌는지 보여준다.

7. 1. 드라마

7. 2. 영화

7. 3. 문학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가 1929년에 출간되었다.[2]

참조

[1] 뉴스 A hamlet rich in history and art http://koreajoongang[...] 2011-06-01
[2] 뉴스 Murder, misery and mercy: Boy-king's life brutally cut short https://www.koreatim[...] 2019-11-16
[3] 웹사이트 Forgotten story of Princess Gyeonghye https://www.koreatim[...] 2014-04-04
[4] 문서 북한에서는 '''로'''사응군이라 읽는다.
[5] 문서 배류지인 영월에서 홍윤성의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6] 서적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조선왕조실록 1454-01-10
[7] 서적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조선왕조실록 1464-04-18
[8] 웹사이트 단종애사 https://www.koreafil[...] 한국영상자료원
[9] 웹사이트 단종애사 http://www.kmdb.or.k[...]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10] 웹사이트 사약 http://www.kmdb.or.k[...]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11] 웹사이트 TV 검색 파천무 출연 https://search.daum.[...] DAUM
[12] 뉴스 비운의 왕 단종의 외로운 넋 달랜다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12-04-16
[13] 서적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조선왕조실록 1456-06-11
[1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15] 서적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http://sillok.histor[...] 1456-10-21
[16] 서적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 1569-05-21
[17] 서적 세조실록
[18] 뉴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http://artsnews.mk.c[...] 아츠뉴스 200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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